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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는 시대의 불안
집 안을 둘러보면 언젠가 쓸지도 몰라서 남겨둔 물건들이 곳곳에 쌓여 있다. 낡은 영수증, 오래된 화장품, 이미 단종된 전자제품의 포장 박스까지.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언젠가 필요할지도 몰라’라는 말로 정당화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이런 마음은 단순한 게으름이나 정리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저장 강박증(hoarding disorder)’이라는 심리적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저장 강박증은 물건을 버리는 것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불필요한 물건을 과도하게 쌓아두는 상태를 의미한다. 미국 정신의학회(APA)는 2018년부터 저장 강박증을 독립적인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다. 즉, “성격이 문제야” 수준이 아니라, 뇌의 감정 조절 기능에 실제로 변화가 생긴 상태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언젠가 쓸지도 몰라’ 하는 마음의 심리적 이유부터, 정리하지 못하는 마음의 본질, 그리고 비움이 주는 심리적 회복까지 단계적으로 살펴본다.

1. “언젠가 쓸지도 몰라” — 버리지 못하는 마음의 이유
저장 강박증의 핵심에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 라는 심리적 원리가 작동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훨씬 더 크게 느낀다. 그래서 ‘언젠가 쓸지도 몰라’라는 생각은 일종의 불안을 완화하는 자기 합리화다. 물건을 버리는 순간, 그 물건과 함께 가능성까지 잃어버린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다. 물건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의 취향, 나의 과거, 나의 경험을 담은 상징물이다. 따라서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과거의 나의 일부를 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감정적 연결은 저장 강박증을 더욱 강화시킨다.
게다가 정보 과잉 시대에 우리는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압박 속에 살고 있다. 인터넷 기사, 이메일, 사진 파일, 메모 등 디지털 데이터까지 ‘저장’의 범위는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언젠가’를 대비하는 불안이 결국 물리적 공간과 정신적 공간 모두를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2. 정리 못하는 게 아니라, 버릴 수 없는 마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리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장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 정리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버릴 수 없는 마음’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버리는 순간 느껴지는 죄책감과 불안을 견디기 어렵다. ‘이건 나중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이건 추억이 깃든 물건이야’라는 생각이 그들을 붙잡는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애착의 확장이다. 어린 시절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건을 통해 안정감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물건이 곧 ‘안전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공간이 부족해도, 그 물건을 버리는 것은 심리적으로 ‘나의 일부를 버리는’ 것과 같은 감정적 충격을 준다.
또한 ‘정리’라는 행위는 결단을 필요로 한다. 어떤 물건을 남기고, 어떤 것을 버릴지 결정하는 과정은 자신의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저장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결단의 순간이 너무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결국 그들은 결정을 미루며 물건과 불안 모두를 쌓아두게 된다.
3. 저장 강박증: 비워야 보이는 나의 공간
저장 강박증이 심해질수록 집은 점점 비좁아지고, 생활의 질은 떨어진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심리적 공간의 붕괴다.
물리적 공간이 어질러져 있을수록 우리의 정신적 공간 역시 혼란스러워진다. 이는 심리학에서 ‘외부 질서와 내면 질서의 상관성’으로 설명된다. 즉, 주변 환경이 정돈되어야 마음의 안정도 따라온다는 것이다.
비움은 단순히 청소가 아니다. 비움은 ‘자기 인식의 과정’ 이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내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고, 통제감을 회복하는 심리적 치유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연구에 따르면, 저장 강박증 환자들은 뇌의 전전두엽(결정과 판단을 담당하는 영역)과 대상회(감정을 조절하는 영역)의 활동이 불균형하다고 한다. 즉, 감정적 불안이 결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버려야 한다’는 의지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비움은 훈련과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공간을 되찾는 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4. 쌓이는 건 물건이 아니라 불안입니다
저장 강박증의 본질은 ‘물건’이 아니라 ‘불안’이다. 눈에 보이는 물건은 단지 그 불안이 쌓인 결과일 뿐이다. 물건이 많을수록 마음이 안정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물건이 쌓일수록 ‘통제할 수 없다’는 감정이 강해지며, 불안은 점점 커진다.
특히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핍의 기억’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거나, 관계 속에서 상실감을 경험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는 것’에 대한 공포가 크다. 이들은 물건을 쌓아두며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만, 물건은 결코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한다.
저장 강박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릴까’보다 ‘무엇을 남길까’를 중심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는 과정은 자기 존중과 직결된다. 또한 전문 상담이나 인지행동치료(CBT)를 통해, ‘버림=손실’이라는 인식을 ‘버림=회복’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5.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저장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비난한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왜 다른 사람처럼 깔끔하게 살지 못할까?” 그러나 이들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비난하기보다, 그 불안의 뿌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첫걸음은 작게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 단 하나의 물건만 버려보는 것. 그 물건을 버리며 어떤 감정이 드는지 관찰하는 것. 이런 작은 경험이 ‘비워도 괜찮다’는 내적 확신으로 이어진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이 중요하다. 강박은 고립 속에서 자라나지만, 공감 속에서 서서히 약해진다.
‘저장 강박증’은 단순히 청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속 불안과 애착,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심리 현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비움은 상실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점이다. 물건을 버리며 우리는 공간을 되찾고, 나아가 자신을 되찾는다.
결론: 비움의 용기, 마음의 회복
저장 강박증은 현대 사회의 불안이 만든 그림자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버림에서 시작된다. ‘언젠가 쓸지도 몰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남기는 용기. 그것이 비움의 심리학이다.
비움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시작이다. 버림을 통해 우리는 공간을 확보하고, 마음의 숨통을 틔운다.
저장 강박증을 이해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은 결국 나를 돌보는 일이다.
오늘, 당신의 공간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속삭이자. “이제는, 비워도 괜찮다.”